Fly High
새벽 다섯시가 되면 그녀는 집으로 들어온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오는 시간은 항상 다르지만 대부분 새벽 다섯시가 그녀의 퇴근시간이다. 그녀의 직업은 알 수 없다. 추측하기로는 호스티스나, 바텐더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백을 내려놓는다. 그리곤 방안의 전들을 킨다. 내 눈은 방의 전등을 키지 않아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방의 전등을 키면 항상 눈이 부셔 눈을 비벼야만 한다. 갑작스러운 빛에 내 눈이 익숙해지면 더 확실히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백을 내려놓고 전등을 킨 다음 그녀는 입고 있는 옷을 벗는다. 갈색스웨터를, 검은 색 가죽 재킷을 벗고 미니스커트를 벗는다. 그리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오버 니삭스나, 갈색 스타킹을 벗는다. 그 때가 가장 흥분이 되는 순간이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속옷까지 드러낸 그녀는 욕실로 들어간다.
삼십분 정도 지나면 그녀는 온몸에 베스타월을 두르고 방으로 들어온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섹시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하다. 그녀와 나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창문을 그녀가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햇빛조차 관통하지 못할 것 같은 두꺼운 벨벳커튼으로. 그녀가 문을 닫고 커튼을 치면 나도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다. 나도 그녀와 같이 잠을 자야한다. 자리에 눕는다.
잠은 잘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알바를 나가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만 한다. 만약에 월급을 받지 못한다면 나는 영락없이 이 방에서 쫓겨나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게 돼 버린다. 만약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면 나는 내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나의 우상이다. 그녀를 훔쳐보면서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갖기를 원한다. 그녀의 옷, 그녀의 새하얀 이, 그녀의 티 없이 깨끗한 피부까지. 그녀는 아름답다. 항상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나도 그녀처럼 아름답다면 이 세계에서 더 쉽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녀가 이 세계에서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살아가는 세계보다 그녀의 세계가 더 힘들 수도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것은 당연하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닫힌 창문을 열자 바람이 방충망을 비집고 들어와 시원해진다. 하지만 곧 추위 때문에 피부가 곤두선다. 그녀의 창문을 가린 벨벳커튼은 확실히 두껍다.
컴퓨터를 켜 워드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그녀의 모습을 적어 내려간다. 그녀의 모습은 어제와 다른 것이 없다. 그녀의 하얀 피부도, 긴 생머리도, 그리고 피곤에 쩔어 약간은 푸석해 보이는 얼굴도. 컴퓨터가 놓여있는 좌식책상에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화장품과 똑같은 제품들이 놓여있다. 하지만 그 화장품들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어떤 화장품은 어떻게 써야할지도 모르는데다가, 아무 것도 모르는데 막 쓰다가 쓸데없이 낭비해버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엄마, 아니 그 사람에게 화장품 쓰는 방법이라도 알려달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차라리 그녀에게 물어보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 사람은 내가 전화를 거는 순간, 헛소리를 지껄일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사이에 동생과 나를 비교하는 말들도 서슴없이 내뱉겠지. 동생은 나와는 달리 3류대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할 일없이 알바비로 먹고 살아가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동생은 1류 인생이다. 동생은 은행원인데다가 부모한텐 용돈까지 주는 효녀인 것이다. 빌어먹을. 속이 답답해진다. 창문으로 다가가 녹이 슬어 뻑뻑해진 방충망을 억지로 열곤 창문에 몸을 내민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 너 때문이야. 벨벳커튼으로 가려진 그녀의 방을 노려본다. 커튼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아직 그녀가 일어날 시간은 아니다. 나도 아직 알바를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고. 잠을 자기에는 이미 글렀다.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한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피부에 갑자기 찬물을 갖다 대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찬물은 정신을 되찾게 해주는 데는 확실하다.
잠옷을 벗고 츄리닝으로 갈아입는다. 갈아입는다고 해도 재킷을 입는 것 뿐이다. 발바닥에 붙어있는 머리카락과 과자부스러기를 털어내고 양말을 신는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본다. 머리카락이 헝크러져 있다. 아까 전에 잠시 누워있었을 때 헝크러진 것일까. 하는 수 없이 따뜻한 물을 받아 머리를 감는다. 대충 왁스로 머리카락을 뭉개버려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하면 하루기분이 썩 좋지 않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성가시다. 삼푸를 손에 덜어내 머리를 감는다. 삼푸거품이 일어나면서 내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과자부스러기들을 떨어뜨려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머리를 대충 헹구고 창문으로 다가가 다시 머리를 내민다. 드라이기가 고장이 나서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릴 수가 없다. 하지만 창문에 머리를 내밀어서 바람에 말리면 어느 정도는 말려진다. 그리고 기분은 상쾌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상쾌해진 기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는다. 커튼으로 가로막힌 그녀의 방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뭐, 그러던가. 라고 나에게 무관심한 듯 말한다.
뭐, 그러던가.
목소리를 내 말해본다.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울린다. 그녀는 자신의 벨벳커튼과 어울리는 사람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만져서 대충 말랐다는 것을 확인하고 창문을 닫는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구겨진 옷을 매만진다. 시계는 아직도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자리에 누워있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머리카락은 다시 헝클어질게 뻔하고, 차라리 밖에 나가 산책하다가 알바 하러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키를 챙기고 현관문을 연다. 역시 츄리닝차림으로만 밖으로 나가기에는 상당히 추운 날씨다. 하지만 다시 들어가서 옷을 껴입는 건 상당히 귀찮다.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내가 일을 하는 곳은 아파트와 별로 떨어지지 않은 편의점이다. 편의점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페이도 짠지라 이곳에서 하루 종일 일해도 집세와 생활비를 하기에도 빠듯하다. 물론 그 사람한테 돈을 부쳐달라고 하면 살기에는 편할 테지만 돈을 부치면서 하는 잔소리를 참으면서까지 돈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 사람한테서 돈을 받지 않은지 이제 3년째다.
편의점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안에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다. 편의점에 사람이 오지 않으면 그 것이 꼭 나 때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이 들면 항상 자괴감이 든다. 내가 못생겨서, 혹은 지나치게 뚱뚱해서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오지 않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점점 망상은 심해진다. 아니, 이건 망상이 아니다. 확실한 현실이다. 그 것 이외에 내가 알바를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의 원인은 또 있다. 그 것은 사람들의 태도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사람들은 그나마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거나, 돈을 카운터 앞에 던지는 건 최악이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아이들이라면 더 비참해진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 걸까. 이렇게 되물어도 답은 단 한가지다. 내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걸.
그리고 이번 달, 그러니까 이번 주 주말까지만 알바를 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자발적으로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사장이 이번 주까지만 나와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빌어먹을 사장 놈.
편의점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본다. 점심시간이 되어간다. 이 알바의 가장 좋은 점은 배부를 때까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폐기는 하루에 하나씩은 꼭 나온다. 비록 맛은 없는 것들이지만 말이다. 유통기한이 1시간정도 지난 샌드위치를 렌지에 데워 먹는다.
문 위에 달려 있는 방울이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다. 문을 바라본다. 그녀다. 시계를 본다. 그녀는 항상 똑같은 시간에 편의점으로 온다. 그녀는 어제와는 달리 미니스커트가 아니라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진을 입고 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나도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어 인사를 받는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편의점에서 사가는 것은 항상 똑같다. 병에 담겨져 있는 스타벅스 커피와, 다이어트를 위한 시리얼바. 그녀는 의외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왜. 그녀는 그 것들을 들고는 다른 물건들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카운터로 다가와 계산을 한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삼푸 향이 기분 좋다. 하지만 무슨 향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에게 어떤 샴푸를 쓰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녀의 쇄골은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조금씩 움직인다. 살 때문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쇄골은 아름답다.
그녀는 편의점을 나간다. 그녀는 내가 다음 주부터 이 카운터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단지 알바생일 뿐이고, 그녀는 손님이니까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겠지.
편의점에서 잔뜩 과자를 사들고 들어온다. 그녀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도대체 살 뺄 곳이 어디 있어. 그녀 때문에 나는 더욱 살이 찐다. 주머니를 뒤져 키를 찾는다. 하지만 키는 만져지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고 주머니 깊숙이 손을 집어넣는다. 그제야 키가 만져진다. 키를 꺼내 문을 연다. 그러자 집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던 역한 악취가 다가온다. 언젠가 청소를 해야 할 텐데. 귀찮다. 봉투에서 과자와 우유를 꺼내 우유는 냉장고에 집어넣고, 우선 감자칩 봉투를 뜯어 칩 하나를 집는다. 창문을 바라본다. 그녀의 방에 쳐져 있던 커튼은 걷어져 있다. 눈이 부시다. 햇빛 때문에 그녀의 방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조금 있다 외출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항상 낮 두시정도에 외출을 나갔다 다섯 시에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섯시에 저녁을 먹고, 여덟시에 다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녀가 어디로 외출을 하는지 미행을 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다. 그녀의 방을 바라보다 창문을 닫는다. 이런, 감자칩 부스러기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차라리 방이라도 청소할까. 하지만 귀찮다. 몸을 움직이면 지나치게 피곤해져서 금방 곯아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새벽에 들어올 수 있는 그녀를 볼 수가 없다. 벽에 기대어 앉는다. 바닥에 떨어진 감자칩 조각들은 대충 한쪽구석으로 치운다. 덕분에 바닥에 쌓인 먼지들도 함께 공기 중으로 날린다. 코가 간지럽다. 하지만 기침은 나지 않는다.
리모컨이 어디 있더라.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아서 텔레비전을 킨다. 아직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쇼를 할 시간은 아니다. 대충 아무 채널로 맞추고 과자가 담겨져 있는 봉투를 헤집어 과자를 모두 꺼낸다.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과자를 모두 쏟아 붓는다. 과자 하나하나를 들고 먹는다. 하지만 편의점에 있는 과자들은 모두 먹어본 것들이라 별다른 맛은 없다. 조금 있다 쌀도 살 겸 마트나 갈까. 마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있는 마트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의 피부가 맞닿는다. 난 그 느낌이 싫다. 여름보다는 났지만 사람들이 나와 피부가 맞닿게 되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때때로 내가 피부병에 걸린 환자 같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그들이 백반증에 걸린 환자라고 생각하고 무시해버리는 편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이 싫은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내가 사람들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는 색맹이 아닌 이상 그렇게 계속 생각하면서 사는 것도 한계가 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과자를 한 움큼 쥐어 입에 집어넣는다. 너 정말 못생겼구나. 라고 내 마음속에서 환청이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했으며 동생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즉,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 같다. 요즘 들어 환청은 더 심해졌다. 환청은 대부분 같은 내용이다. 내가 너무 못생겼다는 것. 그리고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물어보는 것. 나도 이유는 알 수 없으니까 대답할 수는 없다. 그 사람도 나에게 물었다.
왜 태어난 거야?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왜 그런 걸 묻는 당신들이 태어난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의 목소리 같기는 해도 그녀가 아니다. 당연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한 번도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하루에 두 번 정도 나와 얼굴이 마주쳤다. 아마 내가 편의점을 그만 둬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은 편의점에서 한번과, 창문에서의 한번. 이젠 편의점 알바도 그만두니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창문 앞에서의 한번뿐이다. 그녀와 여러 번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숨소리와 샴푸향, 방의 구조뿐이다. 솔직히 그녀가 호스티스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단지 놀기를 좋아하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대생일지도 모른다. 어쩔 때마다 담배를 피우고, 욕설을 내뱉고, 남자들을 유혹하는 그런 경망스런 여자일지도.
배가 부르다. 과자는 어느새 반 정도가 사라져 있다. 과자가 남은 신문지를 방구석으로 치워놓고는 책상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킨다. 인터넷을 뒤진다. 웹 하드에서 게임을 다운로드받고, 애니메이션을 받는다. DVD를 살 돈은 없다. 당장 방값을 내기도 빠듯한데 dvd를 사는 사치스런 일을 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런 빈곤한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선 이런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다운로드받은 애니메이션을 본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지겨워 져서 시계를 바라본다. 다섯 시. 그녀가 외출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해는 벌써 지고 있다. 창문으로 다가가 그녀의 방을 바라본다. 햇빛이 비쳐서 잘 보이지 않던 그녀의 방이 확실히 보인다. 그녀의 방은 심플하지만 꼭 있어야 할 것들이 갖춰져 있다. 옅은 분홍빛이 섞인 하얀색으로 칠해진 화장대와, 그 화장대 앞에 가지런히 서있는 화장품. 그 화장품 중에는 절반정도 밖에 남지 않은 화장품도 보인다. 그리고 화장대에 있는 거울과는 따로 전신거울이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전신거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전신거울에서 내 얼굴이 비춰지는 곳은 거울 아래쪽의 왼쪽 귀퉁이다. 전신거울의 옆에는 책장이 있다. 책장에 빼곡히 꼽힌 책은 모두 다이어트나, 화장법에 대한 책들이다. 그녀도 책을 보고 화장법을 배운 걸까. 나도 저 책들을 보면서 화장을 하면 그녀처럼 아름다워질까. 어이없는 생각이다. 그녀가 들어온다. 나는 창문 아래로 몸을 숙인다.
방에 있는 전신거울에 비춰지는 그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백을 화장대위에 내려놓는다. 그녀는 그녀의 전신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그녀의 몸은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지나치게 왜소해 보이기도 하다. 만약 내 살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면 그녀에게 조금 줘서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싶다. 아마 그녀도 전신거울에 비춰지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내가 모르게 비웃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오늘도 역시 밤에 집을 빠져나간다. 그녀의 구두소리가 복도를 타고 들려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면서 발을 동동거리며 생기는, 굽과 콘크리트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는 ‘띵’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1분정도 아무 것도 안하면서 기다린다. 들리는 소리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와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다. 아파트 아래로 그녀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스커트와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아파트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다섯 시까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진정하자. 심장이 떨린다. 당연하다. 이것은 확실한 범죄다. 무단침입이라니. 하지만 내 발은 계속 그녀의 집으로 가고 있다. 그녀의 집 앞. 내 집과 다르지 않은 문 앞이다. 문에 붙은 광고지가 신경 쓰인다. 그녀는 생각보다 둔한 모양인지, 문에 붙은 광고지를 뜯어내지 않았다. 뜯어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내가 집에 침입했다는 것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그녀를 며칠 동안 관찰하고 나서 나는 그녀가 집 열쇠를 방범창 아래의 구멍 난 콘크리트에 놓고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열쇠를 꺼낸다. 차갑다. 마치 한 번도 열쇠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열쇠구멍에 집어넣고 돌린다. 녹이 슬었는지 잘 돌려지지 않아 두 손으로 돌려본다. 그제야 열쇠가 돌아가면서 문이 열린다.
그녀의 방은 차갑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있었던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바닥에 발바닥을 내려놓는다.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불을 킬 수는 없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방안의 모양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 그녀의 방안은 내 방과 완전히 반대방향이다. 부엌의 싱크대도, 화장실도. 심지어 아파트에 공통적으로 있는 아파트 명패까지도. 하지만 방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다르지 않다. 당연히 그녀의 방을 훔쳐보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보고 내 방을 꾸몄으니 다른 것이 있다면 그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책장 옆의 전신거울 앞으로 다가간다. 전신거울에는 내 방의 창문이 보인다. 어둠에 잠긴 내 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보인다. 윤곽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내 방의 먼지까지 확실히 보이는 듯하다. 눈을 비빈다. 잘못본거겠지. 전신거울은 나에게는 전신거울이 아니다. 내 몸의 절반만 비춰진다. 거울을 깨부수고 싶어진다.
책장을 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책장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은 미용에 관련된 책들이다. 하지만 의외로 책장 구석에 소설책들도 있다. 주머니에서 볼펜과 수첩을 꺼내 책장에 꽂인 책의 제목을 적는다. 책의 대부분은 미용에 관련된 책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이어트에 대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뭐야. 거짓말. 도대체 어딜 뺄게 있다고 다이어트 책들이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화장실로 들어가 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던 향이 화장실에도 가득 차있다.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다. 세면대 옆에 놓여있는 샴푸와 린스 통을 들어 자세히 살펴본다. 하지만 모두 영어로 씌어져 있는데다, 글자가 지워져서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본다.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샴푸는 마치 끈기가 있는 우유 같다. 그러고 보니 이 화장실은, 아니 이 집은 이 향기로 가득 차 있다. 화장실을 나와 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마치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것 같이,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먼지가 쌓였지만 깨끗하다.
컴퓨터의 전원을 킨다. 전원은 제대로 들어오는군. 부팅속도는 마치 처음 컴퓨터를 킨 것처럼 빠르다. 점점 불안해진다. 뭔가를 더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부팅이 완료된 컴퓨터의 바탕화면은 깨끗하다. ‘휴지통’과 워드프로그램만 있다. 워드 프로그램을 클릭해 작성된 문서가 있는지 확인해본다. 상당히 많은 수의 문서파일이 있다. 시계를 바라본다. 아직 그녀가 올 시간은 아니다. 문서파일을 클릭해 내용을 살펴본다. 기괴한 내용이다. 소설이라도 쓰고 있는 걸까. 뚱뚱한 여자의 생김새를 묘사한 글이다. 기분이 나쁘다. 서둘러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구겨 신는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돌아 올 것 같아 수첩을 든 손이 떨린다. 수첩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는다. 현관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 하지만 방안과 온도 차이는 없어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순간, 모든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면서 조금씩 부서지는 콘크리트소리까지도. 그녀가 타고 있는 걸까. 엘리베이터를 지나친다. 다행히 내려가는 중이다. 내 방의 문을 열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내 방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지만 따뜻하다. 그녀의 방은 마치 도자기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 든다.
그녀가 올 때까지 잠은 자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시계를 돌아보게 된다. 창문을 통해 보는 그녀의 방은 윤곽만 조금 보일뿐이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어도 보이는 것은 윤곽뿐. 그녀의 방에서 보았던 내 방의 모습과는 다르다. 물론 이른 시간이라 내방의 모습이 훨씬 잘 보일 수도 있다. 그래, 그랬던 거지. 암시를 건다. 그런 거라고. 단지 내 망상일 뿐이라고. 하지만 불안감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비웃는다. 닥쳐.
잠깐, 열쇠?
주머니에 쑤셔 넣은 수첩을 꺼내자 열쇠가 함께 빠져나온다. 그러고 보니 문을 잠그고 오지 않고, 컴퓨터도 전원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보고 저기를 또 가라고? 싫다. 그건 싫다고. 무서워. 열쇠를 만지작거린다. 순간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들린다. 글렀다. 그녀의 구두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운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구두소리가 문 밖을 지난다. 하지만 그 소리는 사라진다. 어떻게 된 걸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간다. 그녀의 구두소리는 흡사 콘크리트에 먹혀버린 것처럼 뚝 그쳤다. 나는 현관문의 보안경에 눈을 댔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뭐야. 내가 잘 못들은 걸까. 하지만 내가 보안경에서 눈을 떼자마자 나던 갑작스러운 구두소리 때문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덕분에 깨문 손가락에 잇자국이 나있다. 그녀는 밖에서 보안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것이다. 그녀의 구두소리는 점점 사라진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창문 아래에 몸을 기댄다. 그녀의 방에 있는 것과 똑같은 전신거울이 그녀의 방을 비춘다. 그녀는 조용히 들어온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창문으로 곧장 다가온다. 그리곤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방에 놓인 전신거울을 통해 그녀가 내 방 창문을 아직까지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창문 가까이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방을 훔쳐보면서 그녀의 방과 똑같이 꾸몄다는 것과, 그녀에 대해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 까지. 사실 처음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신거울에는 내 모습은 비춰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자신을 또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다. 흡사 살쾡이가 어둠속에서 내 목을 노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쓴다면 발톱을 세워 나에게 상처를 입힐 것만 같다. 체중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5kg은 빠졌을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전신거울을 치우고 싶다. 내가 의식하지만 않는다면 이 스트레스는 사라질 테니까.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잘못됐다. 그녀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아니 그녀가 처음부터 이 아파트로 이사 오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아파트로 이사 온 것까지는 상관없다. 왜 하필이면 나와 마주보고 있는 방일까. 이건 흡사 누가 그녀에게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어 버리기 위해 사주한 것 같다. 이건 내가 외모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원한 것이다.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 그건 누구지?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엄마와 동생, 그리고 사장, 그리고 학생 때 동창들과 선생들. 하지만 이 중에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엄마와 동생뿐이다. 그 두 년들 짓인가.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년들. 온몸이 떨린다. 당장이라도 그년들의 집으로 찾아가 머리채를 붙잡아 내팽게치고싶다. 도대체 왜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야하는 건데. 더구나 지금 이 상황은 뭐야. 이를 악문다. 손톱을 깨문다. 날카로운 손톱이 잇몸을 스쳤는지 손톱에 피가 묻어나온다.
다시 전신거울을 바라본다. 그녀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 실리콘인형을 세워놓은 것 같다. 단지 그 것과 다른 점은 입을 다물고, 계속해서 눈을 깜박이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속으로 나를 짓밟고, 비웃고 있을지 모른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짓밟으면서 아프냐고 묻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손가락이 쓰려온다. 전신거울속의 그녀는 무섭도록 아름답다. 지나치게 날카로워 거울속의 그녀에게 손을 대기만 하더라도 손이 베일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렸을 때의 동생과 그 사람의 얼굴을 반반씩 섞어놓은 것만 같다. 정말, 빌어먹을 인간들이다. 왜 도대체 그 인간들은 내 주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까. 난 떠났잖아. 너희들이 싫어해서 내가 사라져줬잖아.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거울 속에서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들려오는 쇠뭉치가 부딪히는 소리. 그녀가 집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곤 복도를 울리는 구두소리. 참을 수 없다. 팔뚝을 깨문다.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밑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든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찾아올 것만 같다. 현관으로 다가간다. 구두소리도 가까워진다. 보안경에 눈을 대고 그녀가 지나치기를 기다린다. 달조차 떠있지 않은 밤의 복도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구두소리는 계속난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치거나, 문 앞에 서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날가지고 노는 걸까. 이렇게 내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손에 땀이 맺혀서 쥐고 있는 칼이 떨어질 것 같다. 칼을 다른 손으로 옮기곤 손바닥을 바지에 닦는다. 숨을 몰아쉰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그녀가 지나간다. 아니,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고 선다. 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안경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거겠지. 그녀는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한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입모양을 보고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밖에 없다.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쥔다. 칼날을 타고 땀방울이 떨어진다. 더 이상 저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 저 일그러진 얼굴은 구역질이 난다. 눈을 꽉 감았다 다시 눈을 뜬다. 어서 결정해. 뭘. 죽여 버리자. 죽여서 저 얼굴을 가지는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헛소리. 닥쳐. 거짓말. 웃기지마. 죽여. 죽여 버리자. 머리가 복잡하다.
죽이자.
그녀는 여전히 보안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지금 문을 열면 여지없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지. 문을 연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 자리에 그녀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 같다. 당황스럽다. 모든 것이 환각에 불과했다는 건가. 두 손에 쥐고 있던 식칼을 떨어뜨린다. 기가 막히다. 내가 본 모든 것이 환각이고, 환청이라는 걸까. 눈을 세게 비빈다. 떨어뜨린 식칼을 다시 집어 들고 그녀의 방으로 걸어간다. 오싹하다. 그녀의 방으로 가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두 손으로 식칼을 꼭 붙잡는다. 그녀의 집 앞에 서서 보안경을 바라본다. 마치 그녀와 나의 위치가 뒤바뀐 느낌이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문 앞에 서있었을까. 문을 연다. 문은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다는 듯 열린다. 차가운 공간은 여전하다. 그녀는 방에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처음과 마찬가지다. 내가 미처 끄지 않고 놔둔 컴퓨터도 전원이 내려가 있지 않다. 마우스를 움직여 대기상태에 있는 컴퓨터를 작동시킨다. 여전히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휴지통’과 워드프로그램만 있다. 워드프로그램을 열어 작성된 문서가 있는지 확인한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서가 작성되어 있다. 문서 중 하나를 열어본다.
뭐, 뭐야.
식칼을 떨어뜨린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웃기지마. 다른 문서를 열어본다. 똑같다.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하나 다 확인한다. 똑같다. 문서가 들어있는 폴더를 휴지통에 집어넣는다. 온몸의 떨림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개수작 하지 마.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의 전원을 끈다. 어디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 미친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뒤집어놓는다. 책장에 꼽아져 있는 책을 모두 헤집어내고, 방 한구석에 있는 전신거울을 넘어뜨린다. 거울은 산산조각이 난다. 거울조각이 발에 밟혀 피가 새어나온다. 하지만 고통은 없다. 화장대에 놓인 화장품을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하아. 진정하자 진정해. 환각일 수도 있어. 흥분만 가라앉히면 괜찮아질 거야. 마음을 다잡는다. 눈을 꼭 감았다 뜬다. 눈앞이 흐릿하다.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연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현관으로 뛰어가 손잡이를 돌린다. 당연하다는 듯 문은 열리지 않는다. 바닥에 놓아둔 식칼을 들어 손잡이로 창문을 내리친다. 창문은 흠집조차 남지 않는다. 계속해서 창문을 내리친다.
뭐야.
창문너머 내 방에 그녀가 서 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웃는다. 평소와 똑같은 미소로. 그녀의 방과 내 방은 전혀 차이가 없다. 이제 어디가 내 방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점점 졸리다. 그녀는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 그녀의 입모양은 아까전과 똑같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알 수 있다.
난 너야.




4 (1) 

2개의 댓글 | 조회수 : 528

+5
현재 게시판의 최근 댓글